글 | 정정석 수의사
대한수의사회 제공

인천광역시 송도에서 3년 차 인턴으로 일할 때가 문득 생각난다.
그 병원은 정말 호황일 때 페이닥터가 5명이 넘었고 늘 수술이 넘쳐났다. 나는 그 정점을 조금 지나서 본격적으로 꼬꾸라지는 시기에 입사했다.

IMF의 여파가 경제를 뒤흔들었지만 90년대 말부터 은근 소동물 임상이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취업의 쏠림 현상이 갑자기 생겨나 인력 pool이 넘쳐났다. 당시는 대부분 1인 병원 원장 시스템이었고 생업을 위한 봉직의는 전무했다. 그래서 1인 원장이 폭주하는 진료를 감당하지 못하면 동문 후배 찬스를 쓰며 하나 둘 기용하기 시작했는데 그 시기가 2000년대 초반이었다. 하여 저년차 동문 위주의 인적 구성이었고 대부분 갓 졸업한 1, 2년차 임상의들로 한창 배우는 과정이라 심화진료보다는 케이스 바이 케이스를 익히는 단계였다. 

다시 말해, 소동물이 포텐 터지며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직전, 꽃봉오리 시기였다. 그래서 배움에 갈증을 느낀 원장님들과 페이닥터들은 자체 세미나를 왕성하게 유치하면서 초석을 다지고 듣보잡 질환을 섭렵해가곤 했다. 그래서 주로 단순 진료가 많았고, 수기차트의 한계가 있었으며 난케이스는 캐치하지 못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경우도 흔했다. 그렇지만 SOAP의 확립과 더불어 과학적인 진단장비의 활용과 우수한 치료법의 발전으로 수의학은 일취월장하였다. 더구나 연부조직, 골절 등의 다빈도 외과 수술은 케이스가 넘쳐나서 그야말로 수술실 할로겐 수술 등은 불야성을 이뤘다.

그러나 2004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매출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이후 좋아질 거야, 좋아질 거야 하던 게 지금까지 왔다. 물론 수의학의 눈부신 도약은 선명했다. 탁월한 인재의 배출과 첨단과학장비의 운용, 심도 있는 과목별 전문인력의 탄생으로 수의학계의 지평은 넓어졌고 위상도 그만큼 높아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에 반해 무한경쟁 속에 속수무책 버티지 못하는 동물병원의 출연과 낮은 수가로의 경쟁, 과도한 투자, 수의사에 대한 저열한 사회적 인식으로 내몰리며 속 빈 강정으로 전락하는 경우 또한 상존한다. 빛과 그늘은 화려함과 암울함으로 부익부 빈익빈의 양극화가 심화되어 풍전등화의 위태로움이 도사리고 있어 위험하다. 애써 모른 척해도 그 사각지대는 분명 존재하고 업계의 아픈 손가락임이 틀림없다.

가끔 원장님은 그 잘 나가던 시절을 그리워하면서 가녀린 눈빛으로 추억하곤 했다. 수의사실에서 회한에 젖어 한동안 말잇못 멈칫하시더니 그때를 갑분싸 회상했다.
 

원장님 : 지금은 슬렁슬렁 일하지만, 많이 올 때는 하루 몇 마리 온 지 아냐?

지금 생각하면 별로 놀랄 일도 아니었는데 그 순간에는 나조차 깜놀했다.
 

나 : 외래진료가 몇 마리나 왔는데요?

 

원장님 : 언젠가 110마리가 왔더라.
수술 10개 포함으로. 수술실에서도 진료하고 바로 수술 들어가고 난리도 아녔다. 진찰하고 주사 놔주고 그냥 보내는 식이었지. 정말 6.25가 따로 없는 전쟁통이었어. 장부가 너덜너덜해지도록 빼곡한 걸 보니 가슴이 벅차오르더라.

 

거의 개 위주였고, 그 많던 환자들을 지금 방식으로 원칙대로 붙잡고 진료를 했으면 얼마나 더 대단한 파이를 만들었을까? 진득하니 상담하고 검사를 했다면 대기실이 난리법석이 났겠지. 상상만 해도 흐뭇하고 복에 겨워 광대승천 자지러졌을 것 같았다.

2004년 11월, 추풍낙엽처럼 매출이 떨어지자 혹시 그게 내 책임인 것만 같아 부담감이 없진 않았다. 지금이나 그때나 아는 게 별반 다르지 않지만, 그냥 좀 미안한 마음은 있었다. 그리고 사실상 초년 차에 배운 스킬로 평생 써먹는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한번 익힌 습관과 프로토콜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술기 또한 타파해가며 실력을 늘려야하지만 게으르고 자신감이 떨어져서 늘 거기서 거기 제자리걸음이었다.(고1 2학기에 취업이 잘 된다는 친구들의 말에 친구 따라 강남 가서 이과를 갔던 게 지금의 내가 되었지만 사실상 문과 체질인 것 같다는 생각이 나이 들수록 들었다.)

어떤 하루엔 원장님이 진료 수의사 3명을 2층 생활 집으로 불렀다. 비도 오고 고객도 없었던 스산한 늦은 오후에 뜻밖의 콜은 난감하고 불편했다. 매출이 바닥이라 정리해고 스멜이라는 직감이 들어 군필이었던 나는 여자 선생들보다 년차가 낮았기에 내가 칼바람의 타겟임이 분명했다. 잘리면 또 어디로 가야할 지 아득하여 2층을 오르는 심정은 실로 복잡미묘 착잡했다.

올라갔더니 식탁 가운데 보스 자리에 원장님이 앉아 계셨고 자연스럽게 우린 그 옆으로 마주보며 앉았다. 사모님이 마른안주를 내오셨고 불은 꺼져있어 음침했지만, 식탁 위 전등만 노랗게 빛나며 서로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각이 생겨 그로테스크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단도직입적인 발언이 예상되는 가운데 나는 잔뜩 긴장을 하며 실내를 가볍게 두리번거렸다. 살림살이는 단출했고 정리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원장님 : 날씨도 그렇고 술 한 잔씩들 하자.

나 : 진료는 어떡하죠?

원장님 : 손님도 없잖아. 늦은 오후라서 진료 그만하고 정리하면 돼.

여수1: 갑자기 왜?

여수2: 그러게요. 술 못 드시잖아요.

원장님은 소주 한 잔이 주량이었고 대신 담배는 헤비스모킹왕짱이셨다.

원장님 : 매출도 안 나오고, 선생들 월급도 줘야하는데 심란해서 한번 불러봤네.

정리해고의 총부리는 나를 겨누고 있었다. 원장님의 다음 대사를 짐작하고도 남을 깊은 한숨과 시름이 얼굴의 주름으로 느껴졌다. “어느 날 우연히 그 사람 본 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지“라는 쿨의 ‘운명’이란 노래가 입에서 자꾸 맴돌았고 운명의 벽시계에선 또깍또깍 초침 소리가 괴랄하게 들려왔다.

나 : 아. 네~에.

원장님 : 한 잔씩만 하자.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식장에서 양주를 한 병 꺼내오셨다. (갈색 빛이 은은하니 딱 봐도 고급진 술이었다.)

원장님 : 이게 발렌타인 21년산이야. 내 임상 스승 원장님이 선물해주신거야. 받은 지 한 10년 됐나?! 주시면서 힘들 때 이거 마시면서 풀라고 주셨어. 요즘 병원이 엉망이라 기분이 울적하네. 그래서 불렀어.

도날드 트럼프적 정리해고는 아닌가!? 한 시름 놨지만 경계는 늦출 수 없었다.
그런데 10년 전에 받은 술이 완전 새것이었다. 후달렸다. 딱 봐도 이건 셋 중 하나였다. 무척 아끼던 거라 소중해서 개봉을 못했거나 술과 안 친해서 의절 손절이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그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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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동안 힘든 일이 없었던 것이었다. 리즈 시절이라서.

가득 차 있는 발렌타인 위스키가 원장님의 10년을 말해주고 있었다. 너무 부러워서 패배를 시인하며 배가 살살 아파왔다.
 
원장님이 따라주셨고, 우린 양주잔에 가득 받아서 약식으로 건배를 외치며 특전사 박군처럼 한잔했다. 쓰고 달고 화끈하고 오묘한 맛이었다. 저렴한 입맛에 맛이 있을 리가 없었다. 화끈함에 식도가 요동을 치면서 거부반응을 나타냈다. 송충이는 솔아 솔아 푸른 솔만 묵어야 제맛이었으니 그게 바로 솔솔한 마데카~술이었다.

정말로 딱 한 잔씩 돌리고 판은 즉시 정리되었다. 여자수의사 2명과 나는 기깔나게 주당들이었는데 입맛만 버렸다고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눈빛을 교환했다. 딱 한 잔이 원장님의 주량이라서 그건 그분에게 분명한 과음이었고 소중한 술이라 아껴드시는 것이 분명했다. 또 힘들 때 드시려고 마개를 꼭꼭 밀봉했다. 다신 힘든 일이 없길 바라며.

다행히도 나는 그 병원에서 잘리지 않았고 무사히 1년간 근속했다. 예의상이겠지만 더 있으라는 말까지 들었다. 효자 상품은 아니었지만 평타는 쳤거나 구할 사람이 지독하게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쓸모 있는 인간이 되는 길은 생각보다 어려운 것 같았다.
많은 시간이 지나 지금은 원장님이 병원을 정리하고 은퇴하셨지만, 때론 그 발렌타인 21년산이 바닥을 드러냈을지 그대로 찰랑거릴지 아주 조금은 궁금하다. 아마도 힘든 일이 없을 순 없을 테니 가끔 홀로 새벽에 한 모금에 삭히지 않았을까? 나도 그런 술을 선물 받거나 선물하고 싶다. 외로움은 어떤 감정이 아니라 극복해야할 고통의 영역이니깐 그럴 때 술이 치료제가 되어 줄 테니까. 

지아가 부릅니다. # 술 한잔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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